"신앙을 열정적으로 뜨겁게 불태워야 맞는 걸까?"
서로가 지금의 교회 체계와 시대를 포용하지는 못하는 보수성에 지쳐있는 우리 둘은 막다른 질문에 다다랐다. 모태신앙으로 어릴적부터 신앙을 키워오고 성경에 익숙하며 한때 교회 사역에 열정을 다 부었던, 둘이다.
5년을 해외에서 선교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성경을 스스로 해석하고 묵상하는 능력을 위해 성경연구학교를 다녔던 나는 내 또래보다 딱 그 5년이 뒤쳐져있다. (절대 후회하지 않는 5년이다.) 3년 반이 지난 지금 그 5년을 빠르게 채우면서 삶의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 이전에는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무언가 변화시키며 쉬지 않고 무언가를 함으로써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꼈다. 지금은 삶의 안정감을 누리며 오히려 아무것도 안함으로써 동일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여기서 앞서 나온 질문이 나왔다. 안정감을 느끼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과연 올바른 걸까. 아니. 교회를 다니지 않거나 교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잘못된 걸까.
교회에서 무언가 맡아서 토요일과 일요일을 다 교회에서 보내야 하며 어느정도 교회에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순장을 해야 맞는거고. 순원들을 품어야 기독교인으로서 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현재 교회를 다니지 않고 있다. 한국에 돌아와 교회를 찾았지만 그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설교도 순모임도 찬양도. 10년이 지났으나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설교는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같은 세상의 강연과 다를바 없고 순모임은 비기독교 친구들의 모임과 다를바 없었고 찬양은 내가 모르는 곡이 없었다.
젊은 청년들은 시대에 맞게 변화해가고 그들을 품어야하는 교회는 그에 맞게 성장하고 변화해야한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는 성도들을 교회 안에 머물게 하는데 급급하고 성도들이 교회 밖에서 스스로 교회가 되도록 훈련시키지 못한다. 교회에서 세상으로 나가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 성도들은 교회 안에 고여가며 무언가 이중성과 답답함을 느끼며 교회를 떠난다. 그 많은 청년 중 하나가 나다.
"삶의 안정감을 느끼며 요즘 행복하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 근데 내가 교회를 안다닌다고 신앙적으로 뜨겁지고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일까?" "아니 애초에 뜨거운게 그럼 정답인건가? 차가운 건 나쁘다는 거 아니야?" 친구와 얘기하다가 그 구절이 정확히 뭐였는지, 그 구절이 의미하는게 무엇인지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는 이렇게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계3:16)
우선 난 이 구절이 요한계시록인지도 몰랐다. 요한계시록만 얘기하면 교회에서는 해리포터의 '볼트모트' 단어마냥 금기어처럼 다들 입에서 꺼내기를 무서워한다. '아니. 교회가 더 자주 말하고 연구하고 이야기해야하는 거 아닌가'
아무튼. 라오디게아교회에 보내는 예수님 말씀이였다. 그 구절은 우리가 생각했던, 신앙이 뜨거워야한다. 정말 이런 의미일까.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는 한 구절만 가지고 1차원적으로 해석하면 매우 위험하다. 그 성경구절이 작성된 시기와 목적과 그 성경 저자와 목표대상(독자)의 문화를 함께 이해해야 한다. 자 그럼 라오디게아교회는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었나?
라오디게아는 물이 부족하여 인근의 히에라폴리스에서 뜨거운 온천물, 골로새에서는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차가운 물을 끌어왔다. 문제는 라오디게아에 이를 때쯤 되면 뜨거운 물은 식어서 미지근하게 되고, 차가운 물은 더워져서 역시 미지근해진다는 것이었다. 물이 미지근해지면 뜨겁고 차가운 물에 녹아 있던 석회 성분이 침전물을 만들어 내면서 희뿌연 석회수가 되었다. 그 물에 몸을 씻으면 눈병이 생기고, 마시면 구토와 복통을 유발했다. 이처럼 미지근한 물은 씻을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는 물이었다.
즉 신앙이 뜨거워야하며 냉랭한 신앙은 주의해야한다라는 이분법적인 얘기가 아니라, "네가 뜨겁든지[즉 목욕을 위해] 아니면 차든지[마시기 위해] 하다면 너는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나는 너희가 물에 대해 느끼는 것과 같은 느낌을 너희에게서 받는다. 너희는 메스껍다"라는 의미이다. (출저: IVP성경배경주석p.2095) 우리의 믿음이 온천물같이 또는 생수같이 쓸모있는 물같이 되라고 하신다. 또한 "핵심은 기독교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순전한 삶을 소유하는 것이지 그들이 신앙을 어떤 식으로 지녔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출저: IVP성경주석p.1296)
이 구절의 뒷구절들을 보면 더욱이 이해가 된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은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계 3:17~19)
나의 신앙이 충분하다 착각하며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어떠한 노력과 성장과 회개와 변화없는 것이 미지근하다는 것 아닐까. 삶 속에서 나의 믿음이 실제하는가. 발현되고 있는가.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의미 있고 유용한가.
나는 각 사람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이미지는 다를 것이고 그들의 신앙방식도 각각 다를 거라 생각한다. 각 사람의 다름을 아시고 모두가 각자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고 그 모든 이를 이해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다. 그래서 각자의 신앙형태는 다른 것이 오히려 맞으며 그렇기에 상대방의 신앙 방식을 함부로 옳다 그르다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는 서로의 신앙 방식이 옳다 그르다 평가하기보다,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이야기를 사람들과 나누며(계3:20) 서로 그 과정을 격려하고 함께 말씀을 연구하며 하나님을 사랑해나가면 되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곳이 바로 교회가 아닐까. (참고로 지금의 교회가 필요없다라는 그런 극단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의 교회가 만들어지기 까지 우리나라 교회사에서 교회는 중요한 역할들을 해왔다.)
지금 많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 방황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처럼 많은 청년들이 자신 만의 방식으로 신앙을 지켜나가며 새로운 신앙의 방식을. 새로운 교회의 형태를.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 흐름을 응원한다. 물론 그것에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잘못을 평가하며 비난하기보다 그 과정을 격려하며 건강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그리고 그 시대 청년들을 품는 새로운 흐름을 함께 해나가고 싶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교회의 형태가 있다. 친구와 이야기를 하며 그 교회의 형태를 만들어나가는 것을 좀 더 부지런히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별거 없다. 오늘처럼, 친구와 일상 이야기를 하다가 성경을 읽고 말씀을 연구하며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며 삶을 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하는, 오늘 했던 그 활동을 많은 청년들과 하려는 것이다. 오늘 친구와 내가 서로의 신앙생활을 나누며 응원하는 이 순간이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이것을 더 많은 사람과 할 생각에 너무 신난다.
'묵상 meditation 默想'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내가 나를 기특히 여길 날 (0) | 2025.09.13 |
|---|---|
| 이상을 꿈꾸되 현실을 살아내며, 하나님 앞에서 내가 되지 않으려는 나 (0) | 2025.09.13 |
| 사탄의 유혹일까 (1) | 2025.07.19 |
| [말씀] A beautiful vessels ready for good work (2) | 2023.01.24 |
| [책] 함께 하나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0) | 2023.01.24 |
댓글